오타 다쿠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타 다쿠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외야수와 지명 타자로 활약했다. 쓰쿠미 고등학교 시절 '규슈 삼우까마귀'로 불리며 1967년 봄의 선발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1968년 드래프트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지명되어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76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으며, 1982년 플레이오프 MVP, 1983년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감독으로 활동하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La New 베어스, SK 와이번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등에서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선수 - 송재박
송재박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에서, 한국에서는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활동하며 우수 코치상을 수상했다. -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선수 - 히가시오 오사무
히가시오 오사무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NPB 최다 사구 기록과 '싸움 투구'라는 별명을 얻었고,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시절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이다. -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선수 - 송재박
송재박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에서, 한국에서는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활동하며 우수 코치상을 수상했다. -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선수 - 가토 하지메
가토 하지메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투수로서 19년간 활동하며 신인왕 수상, 노히트 노런 달성 등의 활약을 펼쳤으며,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와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 니시테쓰 라이온스 선수 - 가토 하지메
가토 하지메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투수로서 19년간 활동하며 신인왕 수상, 노히트 노런 달성 등의 활약을 펼쳤으며,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와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 니시테쓰 라이온스 선수 - 다키우치 야스오
다키우치 야스오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내야수로 활동했으며, 은퇴 후에는 여러 팀에서 코치와 2군 감독을 맡아 많은 선수를 육성했고 만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오타 다쿠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선수명 | 오타 다쿠지 |
원어명 | Takuji Ota |
일본어 표기 | 大田 卓司 |
프로필 | |
국적 | 일본 |
출신지 | 오이타현 쓰쿠미시 |
생년월일 | 1951년 3월 1일 |
신장 | 170cm |
체중 | 79kg |
수비 위치 | 외야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정보 | |
프로 입단 연도 | 1968년 |
드래프트 순위 | 9순위 |
첫 출장 | 1969년 9월 14일 |
마지막 경기 | 1986년 10월 27일 |
선수 경력 | |
선수 | 니시테쓰 라이온스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세이부 라이온스(1969 ~ 1986) |
감독·코치 경력 | |
감독/코치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1990 ~ 1995) La New 베어스(2004) SK 와이번스(2007)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2008 ~ 2010) |
2. 선수 경력
니시테쓰 라이온스·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 (1969년 ~ 1986년)
1968년 드래프트에서 니시테쓰로부터 9순위로 지명되어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프로 입단 초기에는 대학 진학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몇 순위든 마찬가지, 프로는 들어가고 나서가 승부"라는 생각으로 프로에 입단했다.[1]
1970년부터 서서히 기용되기 시작하여 1972년에는 외야수로 65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12홈런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75년에는 에토 신이치 선수 겸임 감독과의 불화로 2군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1976년에는 개막부터 3번·지명 타자로 기용되었다. 같은 해 처음으로 규정 타석 (17위, 타율 .270)에 도달했고, 23홈런을 기록하며 올스타와 베스트 나인(지명 타자)에 처음으로 선정되었다.
1980년부터는 다부치 고이치가 지명 타자로 정착하면서 외야수도 겸하여 출전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필살 사업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승부 근성이 강한 타격을 선보이며 히가시오 오사무와 함께 약소 시대부터 황금 시대에 이르기까지 라이온스를 이끌었다.
1982년에는 춘계 캠프에서 왼쪽 다리 부상을 당해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에게 낙인이 찍히기도 했지만, 개막 후 5월에 본인 유일의 월간 MVP를 획득했다. 같은 해 리그 전기 우승, 니혼햄과의 플레이오프, 주니치와의 일본 시리즈 제패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플레이오프에서는 에가와 유타카에게서 2일 연속 결승 적시타를 날려 MVP를 차지했다. 1983년에는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MVP를 수상했다.
1986년 은퇴했다. 은퇴 의사를 구단에 전달했을 때, 대타 요원으로 잔류 요청을 받았고,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로의 트레이드 가능성도 있어 은퇴 발표가 11월까지 늦춰졌다.[5]
2. 1. 프로 입단 전
오타는 귤 과수원도 경영했던 겸업 농가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1] 쓰쿠미 시립 제1 중학교 야구부에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으며,[1] 처음에는 3루수였지만 나중에 외야수로 전향했다.[1]쓰쿠미 고등학교 시절에는 통산 타율 .420, 17홈런을 기록했고, 원반 던지기 100m, 100m 12초대의 주력을 갖춘 강타자, 강견, 준족의 선수였다. 동급생 오시마 야스노리(나카쓰 공업), 와쿠마 가즈후미(가고시마 쇼코쿠 고등학교)와 함께 "규슈 삼우까마귀"라고 불렸다.[2]
2학년 때인 1967년 봄의 선발 대회에 좌익수로 출전, 기라 슈이치의 호투로 결승에 진출하여 히로타 스미오가 있던 고치 고등학교를 연장 12회 접전 끝에 2-1로 꺾고 우승했다.[3] 3학년 때인 1968년 여름의 고시엔에 주장, 중견수로 출전하여 3회전에 진출했지만, 모리오카 제1 고등학교에 패했다.[4]
2. 2. 니시테쓰·다이헤이요·크라운라이터·세이부 시절 (1969년 ~ 1986년)
드래프트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9순위로 지명되었다. 하위 지명이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도 고려했지만, 맏형의 경험을 통해 "몇 순위든 마찬가지, 프로는 들어가고 나서가 승부"라고 결심하고 니시테쓰에 입단했다.[1]2년 차인 1970년부터 서서히 기용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외야수로 65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12홈런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75년에는 에토 신이치 선수 겸임 감독과의 불화로 2군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1976년에는 개막부터 3번·지명 타자로 기용되었다. 같은 해 처음으로 규정 타석 (17위, 타율 .270)에 도달했고, 4년 만에 두 자릿수 홈런이자 처음으로 20홈런을 넘어선 23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올스타에 처음으로 출전했고, 베스트 나인 (지명 타자)에도 처음으로 선정되었다.
1980년부터는 다부치 고이치가 지명 타자로 정착하면서 외야수도 겸하여 출전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필살 사업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승부 근성이 강한 타격을 선보이며 히가시오 오사무와 함께 약소 시대부터 황금 시대에 이르기까지 라이온스를 이끌었다.
1982년에는 춘계 캠프 2일째에 왼쪽 다리를 다쳐 조퇴했고,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에게 "그는 낙오자입니다"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지만, 개막 후 5월에 본인 유일의 월간 MVP를 획득했다. 같은 해 리그 전기 우승, 니혼햄과의 플레이오프, 주니치와의 일본 시리즈 제패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플레이오프 1, 2차전에서는 니혼햄의 마무리 에이스 에가와 유타카에게서 2일 연속 결승 적시타를 날리는 활약으로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했다. 1983년에는 두 번째 규정 타석 (11위, 타율 .297)에 도달했고,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MVP를 수상했다.
1986년 은퇴했다. 은퇴 의사를 당시 구단 관리 부장이었던 네모토 리쿠오에게 전했지만, 네모토가 구단주 쓰쓰미 요시아키에게 전달하자 "오타는 대타 요원으로 내년에도 남겨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또한,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로의 트레이드 가능성도 있어 은퇴 발표가 11월까지 늦춰졌다.[5]
3. 지도자 경력
오타 다쿠지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1990년 ~ 1995년), La New 베어스(2004년), SK 와이번스(2007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2008년 ~ 2010년)에서 코치 및 감독을 역임했다.
3. 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군 타격 코치 (1990년 ~ 1995년)
1990년부터 1995년까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3. 2. La New 베어스 감독 (2004년)
2004년에 La New 베어스 감독을 맡았으며, 등번호 '''73'''번을 사용했다.[1]포지션 | 등번호 | 기간 |
---|---|---|
감독 | 73 | 2004년 |
3. 3. SK 와이번스 1군 타격 코치 (2007년)
2007년 SK 와이번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3. 4.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1, 2군 타격 코치 (2008년 ~ 2010년)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4. 에피소드
- 과묵한 성격으로 벤치에서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느 날,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해 온 노무라 가쓰야가 "왜 말을 안 하는 거냐?"라고 오타에게 묻자, 오타는 "'''말하면 피곤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1984년 미국의 메사 캠프에서, 히로오카 감독의 "금주・금연" 방침에도 불구하고 맥주를 마신 적이 있다.
- 껌을 좋아해서 벤치에서 껌을 씹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 연말연시에 많이 방송된 프로 야구 선수 출연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는 테레사 텐의 『때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를 불렀다. 또한, 후지 TV의 해설자 시절에는 설날 특집 『스모 방별 대항 노래자랑』(스모씨름 선수의 노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을 맡은 적이 있다.
- 1977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오타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서 1위 지명되었지만 입단을 거부한 에가와 스구루에 대해서는 "그가 입단했었다면 라이온즈는 세이부로 매각되지 않고 하카타에 계속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바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으며, 그런 일도 있어서 198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에가와와 대결했을 때 "불탔다"라고 회상하고 있다.[7]
5. 상세 정보
오타 다쿠지는 쓰쿠미 고등학교 시절 강타자, 강한 어깨, 빠른 발을 겸비한 선수로 주목받았다. 1967년 봄의 선발 대회에 좌익수로 출전, 기라 슈이치의 활약으로 결승에 진출하여 고치 고등학교를 꺾고 우승했다.[3] 1968년 여름의 고시엔에서는 주장 겸 중견수로 출전, 3회전까지 진출했지만 모리오카 제1 고등학교에 패했다.[4]
1968년 드래프트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9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1] 2년 차인 1970년부터 점차 출전 기회를 얻었고, 1972년에는 외야수로 65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12홈런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75년에는 에토 신이치 선수 겸임 감독과의 불화로 2군에 머물렀지만, 1976년 개막부터 3번·지명 타자로 기용되었다. 같은 해 처음으로 규정 타석 (17위, 타율 .270)을 채우고 23홈런을 기록하며 올스타와 베스트 나인 (지명 타자)에 선정되었다.
1980년부터 다부치 고이치가 지명 타자로 고정되면서 외야수도 겸하게 되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필살 사업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승부 근성이 강한 타격을 선보이며 히가시오 오사무와 함께 약체였던 라이온스를 강팀으로 이끌었다.
1982년 춘계 캠프에서 왼쪽 다리 부상을 당했지만, 5월에 월간 MVP를 수상하며 부활했다. 같은 해 리그 전기 우승, 니혼햄과의 플레이오프, 주니치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플레이오프에서는 에가와 유타카에게서 2경기 연속 결승 적시타를 쳐내며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했다. 1983년에는 두 번째 규정 타석 (11위, 타율 .297)을 기록하고,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MVP를 수상했다.
1986년 은퇴했다. 구단 관리 부장 네모토 리쿠오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지만, 구단주 쓰쓰미 요시아키는 대타 요원으로 잔류시키려 했고,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로의 트레이드 가능성도 있어 은퇴 발표가 11월로 늦어졌다.[5]
통산 18년 동안 1314경기에 출장하여 3765타석, 3459타수, 436득점, 923안타, 130 2루타, 11 3루타, 171홈런, 1588루타, 564타점, 25도루, 20도루자, 17희생 번트, 44희생 플라이, 213볼넷, 14고의4구, 32사구, 430삼진, 116병살타, 타율 .267, 출루율 .312, 장타율 .459, OPS .771을 기록했다.
지도자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팀 | 직책 |
---|---|---|
1990년 ~ 1995년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1군 타격 코치 |
2004년 | La New 베어스 | 감독 |
2007년 | SK 와이번스 | 1군 타격 코치 |
2008년 ~ 2010년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 1군 타격 코치 |
'''등번호'''
5. 1. 수상·타이틀 경력
- 베스트 나인: 1회(1976년) ※지명타자 부문
- 월간 MVP: 1회(1982년 5월)
- 일본 시리즈 MVP: 1회(1983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1982년)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MVP: 1회(1982년)
5. 2. 개인 기록
태평양크라운
세이부